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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이후 ‘敎化’의 양상 -광해군대 『東國新續三綱行實圖』를 중심으로-
초록
이 논문의 목적은 조선시대 광해군대에 간행된 『東國新續三綱行實圖』의 내용이 어떤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는가를 분석하여, 임진왜란 이후 조선사회의 변화를 다른 각도에서 살펴보는 것이다. 『東國新續三綱行實圖』는 이전 시대에 간행되었던 행실도와 마찬가지로, 일반 백성들을 교화시키기 위해 간행되었다. 하지만 『東國新續三綱行實圖』는 사례의 수가 다른 행실도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았고, 그 내용 또한 이전 행실도와는 차이를 보였다. 『東國新續三綱行實圖』의 간행 시기는 仁穆大妃의 폐모논쟁이 시작됐던 시기와 일치한다. 폐모를 반대했던 세력들은 왕 또한 지켜야할 가치로서 孝를 앞세웠고, 폐모를 주장했던 이들은 왕의 신하로서 지켜야 할 忠을 근거로 폐모를 주장했다. 이 정황이 『東國新續三綱行實圖』에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東國新續三綱行實圖』에 수록된 계모에 대한 효행 사례를 다른 행실도의 것과 비교하거나, 忠의 실행 방법을 비교해보면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또 행실도 수록 과정에서 孝와 忠을 구분하던 모습들 속에서도 간행 당시의 정황이 행실도 내용에 미친 영향을 찾아낼 수 있다. 『東國新續三綱行實圖』는 각자 직분에 맞는 忠을 요구했는데, 그것은 결국 신하들에 대한 압박이자 ‘요구할 수 있는’ 忠의 강조였다. 이는 충신도의 사례들을 살펴보면 더욱 명확해진다. 뿐만 아니라 『東國新續三綱行實圖』가 해석하고 강조한 孝, 忠, 烈도 다른 행실도와 미묘한 차이를 드러낸다. 『東國新續三綱行實圖』가 강조했던 烈은 외부의 남성(왜적)이 정절을 위협할 때 목숨을 버려가며 저항하는 ‘수절’이었다. 이는 사례의 진실성과는 관계없이, 편찬자 남성들의 기대 및 의도가 투영됐다고 봐야할 것이다. 효자도에는 다양한 계층의 인물들이 수록되긴 하였으나, 천민·평민들의 사례를 살펴보면 그들의 사례가 극단적인 것(斷指 혹은 割股)이었음을 알 수 있다. 즉 신분이 낮은 이가 효자도에 이름을 올리기 위해서는 양반 계층의 인물에 비해 더 극단적인 효행을 해야만 했던 것이다. 그리고 『東國新續三綱行實圖』에서 강조한 忠은 다른 어느 행실도보다도 희생을 강조하는 충이었다. 이것은 간행 당시의 정황과 무관하지 않다. 이렇게 『東國新續三綱行實圖』를 다른 행실도와 비교할 때, 몇 가지 특징 및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다. 특히 『東國新續三綱行實圖』는 東國人만을 등장시켰고, 그 등장인물의 수도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행실도의 등장인물은 매우 다양하지만, 행실의 유형은 단조로운 편이고 그 단조로움은 신분 및 성별과 관계가 깊었다. 사실 이 특징은 조선 사회가 강조해온 가치와 크게 어긋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東國新續三綱行實圖』는 광해군의 폐위와 함께 많은 비난을 받았다. 반정에 대한 정당성을 강조하기 위해 광해군은 비난을 받아야만 했고, 이 비난은 결국 조선 사회 전반의 경직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東國新續三綱行實圖』의 내용과 『東國新續三綱行實圖』에 대한 후대의 평가, 그리고 정조대에 간행된 『五倫行實圖』의 복고적 성격을 볼 때 더욱 명확해진다.
키워드
- 제목
- 임진왜란 이후 ‘敎化’의 양상 -광해군대 『東國新續三綱行實圖』를 중심으로-
- 제목 (타언어)
- Aspect of Indoctrination in Choson Dynasty After end of Toyotomi Hideyoshi's Invasion - through the analysis of the Dongguk Sinsok Samkang Haengsil-do which was published during the reign of King Kwanghae -
- 저자
- 정일영
- 발행일
- 2010-04
- 저널명
- 한국사상사학
- 호
- 34
- 페이지
- 67 ~ 1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