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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 下代 道義 禪師의 ‘雪嶽山門’ 開創과 그 向背
초록
본고는 신라 하대 남종선의 초전자인 도의 선사와 그의 제자들을 중심으로 개창된 설악산문에 대한 검토이다. 그 결과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도의 선사는 821년 무렵에 당나라에서 귀국하였지만, 김헌창의 난으로 말미암아 경주에 들어가지 못했다. 그리고 왕실이나 진골 귀족을 단월로 삼을 형편이 되지 못하였는데, 그것은 김헌창의 난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에 그는 설악산으로 들어가 그곳에서 지내게 되었다. 그가 설악산을 택한 것은 그곳에 이미 북종선의 영향력이 퍼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북종선을 밑거름으로 하여 남종선을 전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적어도 사상적인 공통점을 설악산에서 찾을 수 있었던 것이다. 더 나아가 김헌창의 난이 미치지 않았던 곳이 바로 설악산이기도 했다. 설악산에 들어간 그는 왕실의 주목을 받았으며 그곳의 배려로 진전사에 주석하게 되었다. 그러한 일이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이후 진전사와 억성사를 중심으로 해서 설악산문을 형성하였으며 많은 선승들이 그곳을 방문하였다. 그가 살아 있는 동안에도 그리고 열반에 든 이후에도 설악산문은 왕실의 지원 아래 성장하였다. 그런데 설악산문에 변화가 생겨났는데 그것은 억성사 출신의 체징 선사가 장흥 보림사를 중심으로 가지산문을 개창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설악산문은 가지산문에 비하여 그 영향력이 전보다는 낮아졌다. 더구나 명주에서 새로운 굴산문이 탄생·발전하면서 설악산문은 그 그늘에 가려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설악산문의 위상이 약해졌다고 해서 도의 선사의 위상도 함께 낮아진 것은 아니었다. 도리어 도의 선사는 가지산문의 개산조가 됨으로써 장흥 보림사에서 새롭게 탄생하였던 것이다.